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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억, 근원, 그리고 이탈된 이미지들:

                                                                             이민호의 휴대용 풍경과 자화상

 

   

                                                                                                                                                                                  고동연 (미술사)

 

La vie n'est pas ce que l'on a vecu, mais ce dont on se souvient et comment on s'en souvient. (인생이란 당신이 사는 것, 바로 그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인생] 중의 당신이 기억하는 것들, 그리고 기억하는 방식에 관한 것이다.) -- G.G. Marquez

 

현대인들은 수많은 이미지들 속에 둘러싸여 있다. 다양한 매체를 통해서 이중 삼중으로 재현되고 또 재현된 이미지들에 둘러싸여 있다. 그렇다면 현대인들은 과연 일상생활에서 경험하게 되는 수많은 풍경들을 얼마만큼 제대로 정확하게 기억할 수 있을까?

 

이민호의 사진 작업에서 공장 굴뚝, 잔디를 심은 상자, 깃발, 바닷가 등의 풍경 이미지들은 원래의 시-공간적인 맥락으로부터 이탈하여 다양한 배경에 반복, 중첩되어서 등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 관객들은 정확히 어떤 이미지가 어디에 소속되어 있는지를 알 길이 없으며, 인터넷에 떠다니는 수많은 이미지들처럼 이민호의 ‘휴대용 풍경’은 고향을 잃어버린 채 방황하게 된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휴대용 자화상’ 시리즈에서도 작가의 코, 발, 손등 신체의 부분들과 그녀가 소장한 액세서리들만이 나열되어 있다. 게다가 작가는 관객이 자신을 알아볼 수 없도록 얼굴을 가리거나 돌리고 있다. 작가의 가장 특징적인 부분에 해당하는 얼굴이 삭제된 채로 나머지 부분들만이 부각되어 있는 셈이다.

 

결과적으로 근원(origin)을 잃어버린 풍경과 자화상들은 소위 문학 비평, 특히 프랑스에서 말하는 미궁 혹은 심연의 상태(mise en abîme)에 이른다. 이미지가 수없이 반복되고 복사되며 반사되어 어느 것이 원본인지 복사판인지 구분할 수 없게 되고, 그 출처마저도 묘연해지게 된다.

 

풍경을 옮기다.

이민호의 ‘휴대용 풍경’ 시리즈 이래로 변형된 각종 모양의 상자는 유사하거나 동일한 풍경들을 전혀 다른 맥락에 위치시키는 역할을 담당하여 왔다. 하얀 소파가 위치한 풍경은 말라 비틀어져서 갈라진 초현실적인 풍경 위에 혹은 공사판 앞에 위치해 있다. 푸른 하늘의 정경을 담은 상자는 또 다른 하늘의 정경이 액자 너머로 보이는 이미지 앞에 놓여있다. 즉 상자는 이민호 작업에서 이동식 풍경화를 만들어 내는 주요 운송 수단이다.

 

예를 들어 작가가 프랑스에서 거주할 당시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매일 아침마다 바라보던 공장 굴뚝의 이미지는 진달래가 무성하게 핀 밭, 정체 모를 벤치 위, 혹은 창고와 같이 생긴 건물 기와 앞에 놓인 반사경 내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공간에 배지되어 있다. 여기서 전혀 무관해 보이는 배경에 위치한 굴뚝의 이미지들은 작가가 프랑스에서 바라본 원래 굴뚝과 어떠한 관계에 놓이게 되는가?

 

작가는 이와 같이 동일한 이미지들이 그 맥락으로부터 이탈하여 새로운 배경에 삽입된 경우를 ‘소외’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여기서 소외란 단순히 특정한 사회집단에서 개인이 느끼는 감정적인 반응에 한정되지는 않는다. 대신 작가가 주장하는 소외란 자신의 근원으로부터 이탈된 상태, 소위 ‘고향을 잃은 이미지’에 관한 것이다. 영어로는 자기 소외, 혹은 자신의 정체성으로부터의 소외(self-alienation)에 해당한다.

 

근원으로부터 떨어져 나가서 특정성을 잃은 풍경들은 한편으로 새로운 내러티브나 의미를 생성하게 된다. 관객들은 사진이 찍혀질 당시 굴뚝의 상태, 그와 연관된 의미나 이야기들보다 전혀 새로운 환경에 위치한 굴뚝이 불러일으키는 의미나 새로운 상징성들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 휴대용 풍경은 돌아 갈 곳을 잃은 일종의 ‘미아’나 ‘고아’에 해당한다. 지나치게 많은 곳을 여행하면서 변형되어 더 이상 그 근원을 잃어버린 고향 없는 풍경인 셈이다.

 

파편화된 나(작가)의 이미지

휴대용 풍경에서 풍경 사진들이 더 이상 원래적인 시/공간의 특수성을 재현해 내는 수단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다면 그녀의 인물사진, 특히 자화상 또한 그 한계를 드러낸다. 이민호의 자화상 시리즈 ‘휴대용 자화상’의 경우 작가의 신체 부분들은 파편화되어 과연 작가에게 속한 것들인지 혹은 그저 인물의 정형화된 신체의 부분을 보여주기 위한 것인지 혼란스러운 단계에 놓이게 된다.

 

이민호의 휴대용 자화상에는 작가의 모습, 그것도 발, 옆모습, 목, 손 등이 차례로 부각되어 진다. 그리고 상자의 다른 면에는 때때로 작가가 직접 착용한 신발, 벨트, 그리고 자신의 얼굴 위로 우스꽝스럽게 들고 있었던 전구들이 놓여 있다. 하지만 그녀의 자화상에서 얼굴은 교묘하게 가려져 있는데, 작가가 평소 인물을 인식하는 과정에서 얼굴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왔기에 이와 같은 선택은 더욱 흥미롭다. 작가는 얼굴, 특히 눈만 가리거나 자르고 찍은 사진들을 현상소에서 실패한 사진들인 줄 알고 돈을 받지 않았던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가 인물을 파악하는 방식이 전적으로 사회화, 혹은 사회적인 약속에 따른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얼굴을 감춘다는 것은 실은 대상 인물의 핵심적인 부분을 감추는 것과 유사하다. 따라서 얼굴이 가리어진 채 다양한 신체의 부분이나 작가가 사용한 물건들로 이루어진 자화상은 결국 핵심과 무관한, 혹은 그 근원에 해당하는 정체성을 잃은 자화상이라고 불릴 수 있다.

 

작가의 내적 자아가 단순히 외향적인 것들로만 재현되어 왔다면 여성성의 경우에도 상황은 마찬가지이다. 이민호는 <휴대용 자화상>에서 붉은 땡땡이 무늬를 여성성을 상징하는 사회적 코드로 상정하고 과연 여성성이 단순히 땡땡이로 장식된 옷을 입거나 액세서리를 통해서 재현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해서 질문을 던진다. 여성성과 연관된 수많은 이미지들이 범람하는 가운데 진정으로 여성성을 재현할 수 있는 방식을 탐구하기 위한 작업이다. 하지만 이민호의 사진에서 땡땡이 무늬는 무늬로만 남을 뿐 그것은 실제 여성에 의해서 향유되기 보다는 전시용 천으로 진열장에 놓여 있다.

 

풍경이 더 이상 그 원래적인 맥락에서 이탈하였듯이, 작가의 자화상이 더 이상 작가의 고정적인 정체성을 재현하는 수단이 될 수 없듯이, 땡땡이 무늬도 진정한 여성성과는 무관해 보인다. 결국 ‘여성성’이라는 것이 사회가 만들어 놓은 특정한 시각적 코드에 의해서 이해되어지고 강조되어지며 교육되어지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럴 법도하다.

 

기억(근원)으로부터의 해방

작가는 맥락으로부터 이탈한 풍경, 얼굴 없는 자화상, 그리고 땡땡이 무늬만 남은 여성성을 통해서 이미지의 ‘자기 소외’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하지만 과연 이미지들의 근원(그것의 원래 상태나 정체성)에 대하여 아직도 논할 수 있는가? 만약 그 근원 자체가 원래부터 완전한 것이 아니었다면 더 이상 ‘소외’ 자체가 문제시 될 이유는 없지 않은가?

 

한편으로 작가는 인생이란 결국 사는 것 자체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인생의 사건들 중에 무엇을 어떻게 기억하는가의 문제라는 남미 문호 가브리엘 마르케즈의 말을 상기하면서 이미지의 원래적인 상태, 정체성, 여성성에 대한 향수에 잠긴다. 그러나 동시에 그녀는 어설픈 기억, 즉 이미지들의 소위 원래적인 모습이나 근원에 대하여 집착하지도 않는다. 결국은 기억이라는 것도 가변적인 시점에서 행해진 일이며, 기억의 유동성이야 말로 다양한 재현의 방식을 추구하는 사진작가에게는 더 없는 축복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Memory, Origin and Breakaway Images:

     The Portable Landscapes and Self-Portraits of Lee Min-ho

                                                                                                                                      by Koh Dongyeon, art history

 

//La vie n'est pas ce que l'on a vécu, mais ce dont on se souvient et comment on s'en souvient.

Life is not what we have lived, but what we remember and how we remember it. — Gabriel García Márquez

 

People living in the modern age are surrounded by countless images. These images are replicated twofold and threefold, over and over, through various media. If this is the case, how accurately are modern people able to recall the numerous landscapes they encounter in their daily lives?

 

In the photographic art of Lee Min-ho, landscape images such as smokestacks, boxes of turf, flags and seashores are divorced from their original context in space/time and appear, repeated and overlapping, over various backgrounds. In this process, the viewers have no way of knowing precisely what images belong where. Like the countless images roaming around the internet, Lee's "portable landscapes" wander about without a home. The "auto-portable" series also follows along the same lines, presenting an array of the artist's body parts—her nose, her feet, the back of her hand—along with accessories that she possesses. She also covers her face, or turns it away, so that the viewer cannot recognize her. What might be considered the artist's most defining feature, her face, is excluded, and only the remaining parts are highlighted.

 

As a result, the images of landscapes and self-portraits that have lost their origins reach what is referred to in literary theory, especially in France, as a labyrinth or mise en abîme. The images are repeated, copied and reflected countless times, making it impossible to distinguish the original from the reproduction, and even obscuring their sources.

 

 

Moving the Landscape

Various forms of boxes, which have transformed throughout the course of Lee's series of "portable landscapes," have performed the role of situating similar or identical landscapes within completely different contexts. Landscapes containing white sofas are placed on top of other landscapes, such as a surrealistic one of dried and cracked earth or that of a construction site. A box containing the image of a blue sky is placed in front of an image where another sky is visible beyond the frame. Thus, in the works of Lee Min-ho, the boxes are her principal means of transportation in creating portable landscape images.

 

For example, when the artist lived in France, she would look at factory smokestacks every morning from her studio. These smokestacks are positioned in various spaces, from a field blooming with azaleas to an unidentified bench, or reflected in a mirror that has been placed in front of the roof tiles of a building resembling a warehouse. What is the relationship between these images of smokestacks placed upon seemingly unrelated backgrounds and the smokestacks that the author saw when she was in France?

 

The artist explains this separation of identical images from their original contexts and arrangement of them against new backgrounds through the concept of "alienation." The meaning of alienation here is not limited simply to an emotional reaction felt by an individual within a certain social group. Instead, the concept of alienation presented by the artist has to do with the state of being divorced from one's origins, what might be called "images that have lost their homes." This corresponds to the concept of self-alienation from one's own identity.

 

On one hand, images that have proceeded away from their origins and lost their particularity come to form a new narrative or meaning. The viewers end up focusing their attention on the meaning or the new symbolic qualities generated by a smokestack situated in a completely new environment rather than the state of the smokestack at the time the photograph was taken and the meanings or stories related to that. But on the other hand, the portable landscapes correspond to "lost children" or "orphans" who have lost any place to go back to. They are like landscapes without homes; they have traveled to so many places and transformed so much that have lost their origins.

 

Images of the Fragmented Self (Artist)

While the photographs in her portable landscapes are no longer able to perform their proper function of reproducing the original particularity of space/time, her portraits, and her self-portraits in particular, also reveal those limitations. In her "auto-portable" series, the fragmentation of the artist's body parts leads to a state of confusion: Do they actually belong to the author, or are they intended simply to show the typified body parts of an individual?

 

In Lee's self-portraits, images of the artist, consisting only of her feet, her profile, her neck or her hands, are highlighted in turn. Sometimes, on the other side of the box, there are the shoes and belts that the artist herself wears, or the light bulbs that she holds comically over her face. But in the self-portraits, her face is skillfully concealed, a choice that is all the more interesting because she has emphasized the importance of the face in the ordinary process of recognizing the individual. Based on her experience with a processing laboratory refusing to take her money because the people there believed that her photographs with faces—the eyes in particular—covered or cut off were shot by mistake, the artist is claiming that our method of grasping people is based completely upon socialization or the social contract. When she hides her face here, it is actually akin to concealing a core aspect of the individual portrayed. Thus, the self-portraits are realized through various parts of the artist's body or the items she has used, with her face concealed, and could ultimately be called self-portraits that are unrelated to the core or have lost an identity corresponding to their origins.

 

If the artist's internal self has been reproduced simply through outward-oriented things, the situation is the same for femininity. In her self-portraits, Lee assumes the red polka dot pattern as a social code to symbolize femininity and asks whether femininity can really be represented simply through the wearing of clothes decorated with red polka dots or through accessories. Her project is to investigate methods of truly representing femininity amid an inundation of images associated with it. But the polka dot pattern in Lee's photographs remains simply a pattern and is placed in a display case as decorative fabric rather than actually being a possession enjoyed by the woman.

 

Just as the landscapes broke away from their original contexts, and just as the author's self-portraits are no long able to function as a means of reproducing the artist's fixed identity, the polka dot pattern also appears to be unconnected with real femininity. This seems to be a natural consequence if "femininity" is said to be something understood, emphasized and inculcated through certain visual codes created by society.

 

Liberation from Memory (Origins)

The artist uses decontextualized landscapes, faceless portraits and femininity reduced to a mere polka dot pattern as methods of discussing the self-alienation of the image. But is it still possible to discuss the origins (original state or identity) of the images? Would there be any further reason for "alienation" to be viewed as problematic if the sources themselves were not originally complete?

 

In a sense, the artist calls to mind to words of the South American author Gabriel García Márquez, who said that life is ultimately not about living itself but about the issue of how to remember and what to remember among the events of life, and she immerses herself in nostalgia for the original state of the image, identity and femininity. But at the same time, she does not fixate on feeble memories, such as the so-called "original" forms of the images or their origins. Ultimately, memory itself is realized from a variable perspective, and the fluidity of memory can be an unparalleled blessing for the photographic artist pursuing diverse modes of representation.

                                                                           성공적인 풍경의 사유화

                                                                                                                                                                                                               최흥철(미술비평)

 

익명의 일상 풍경을 다루는 이민호가 신작 시리즈를 보여 주는 이번 전시는 풍경 사진의 시점을 제거하고 특정한 풍경의 전형성을 최대한 완성 시키려는 시도가 두드러져 보인다. 이전 “휴대용 풍경” 시리즈에서는 손으로 운반할 수 있는 크기의 열린 여행 가방 속에 실제 자연물인 잔디 떼, 혹은 유사한 식물을 담고, 뚜껑에는 가방이 놓인 장소와 어떠한 맥락도 이어지지 않는 하늘 배경의 풍경 사진을 대비시켜 하나의 오브제로 완성 시켰다. 그 자체로 작가 이민호를 각인시키는 작품의 완결된 형식으로서 관객의 주목을 충분히 끌 수 있었다. 거기에 작가는 일상적인 풍경 같은 소유할 수 없는 것을 가지고자 하는 욕망과, 그것의 작은 실현으로서 자연을 샘플링한다는 독특한 개념을 작업으로 보여 주고 있다. 말 그대로 풍경의 사유화이자 풍경을 정물처럼 박제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 시리즈에서는 이전 오브제와 병행하던 작업 방식에 큰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어쩌면 다소 엉뚱한 방향으로의 전환이 될 수도 잇는 모험적인 시도는 전적으로 휴대용 풍경의 개념 확장을 의도하고 있음이 명백하지만, 평면인 사진 매체로의 전이를 동시에 꾀하고 있음도 역시 감지할 수 있다. 오브제화한 풍경 박스를 실내, 이질적인 장소 또는 도시공간에 이동시켜 다시 촬영하여 사진으로 만들던 작업에서 더 나아가 또 다른 구조의 레이어가 덧붙여진 것이 중요하게 짚어져야 한다. 결국 휴대용 풍경의 진화의 방향은 마치 양파 껍질을 역순으로 입히듯이 화면 내의 얼개들이 점점 증식되고 있음을 암시하며 지속적인 변화를 예고한다.

 

이번 작품들에서도 이민호는 자신의 스타일에 엄격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나이브하기까지 한 형식성을 부여하고 있다. 바로크적 상상력이라고 별도로 명명된 이 작품들은 공통적으로 붉은 새틴의 장막과 가운데를 중심으로 하는 일상적인 풍경이 합성되어 잇는 다중 프레임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마치 장막이 드리워진 스튜디오 또는 극장을 연상하게 한다. 여기서 무대의 배경처럼 풍경 사진이 그야말로 가운데에 끼어져 있다. 사실 각각 따로 촬영된 풍경 사진들은 작가의 삶과 이어진 공간이다. 그리고 그녀의 삶의 가장 중심이 되는 공간은 바로 붉은 무대가 위치한 작가의 스튜디오이다. 몰입을 위해 창조해 놓은 자신의 가장 가까운 곳으로 그녀의 삶과 얽힌 외부의 공간을 초대한다. 그래서 비어 있는 무대에서는 배경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배경이 주인공이 되는 뜻밖의 전환이 펼쳐진다. 그래서 그녀의 풍경은 안으로 갈수록 깊어지는 파사드 같은 깊은 통로의 동굴 속에서 바라보는 바깥의 장면이다.      

 

17세기 초에서 18세기 후반까지 유행한 바로크 양식은 일그러진 진주를 의미한다. 이 양식은 곡선의 과도한 사용과 장식 과잉의 그로테스크함을 부정적으로 비판하기 위해서 이름 지어졌다. 하지만, 19세기 후반 이후로는 의미가 변하여 호사스러운 절대주의의 엄격한 미적 형식을 추구하는 경향의 객관적인 시대 양식으로 정리된 용어이다. 제목에서 암시하듯이 작가는 이번 전시의 작품들 속에 이러한 바로크적 코드들을 곳곳에 배치하고 잇다. 이 요소들은 대략 기법적인 면과 사진 속의 오브제 사용 등 두 가디 방향으로 정리해 볼 수 있겠다. 우선 디지털 사진 합성 작업의 기본 기법인 잘라 내고 다시 교묘하게 이어 붙이기의 사용에서 그 요소를 발견할 수 있는데, 이 기법의 적용이 논리적 귀결이라는 맥락보다는 화면 구성의 알레고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라는 점에서 매우 바로크적이다. 일상과 자연, 그리고 인공 풍경의 대조와 혼재는 지극히 평범한 풍경을 극적인 숭고한 순간으로 끌어올려 놓는다.

다른 한가지 요소는 마그리트적인 상상력이 엿보이는 대도구와 소도구의 복잡한 구도를 이루는 배치에서 찾아볼 수 있다. 화면의 상당 부분을 가리고 있는 우아한 붉은 베일은 보이지 않는 부분에 대한 호기심을 더욱 증폭시킨다. 거기에 달린 황금술과 매듭, 그리고 금빛 액자의 풍경 사진, 과거 그녀의 휴대용 풍경 가방, 소파와 콘솔 등은 실제 그녀가 스튜디오에서 가운데 자리를 비워 놓은 채로 직접 구도를 연출해서 촬영하였을 것이지만 정작 주인공은 부재한 쓸쓸한 정경이다. 그런 그녀의 사진을 바라보게 되는 위치는 화면의 경계 반대편인 객석이다. 이 극장의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오브제의 반복과 재인용의 사건이 또 다시 사유화된 풍경으로 대치, 즉 합성된다. 이 바로크적으로 과잉 반복되는 풍경은 다시 순환적인 구조를 완성한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작가는 풍경을 정물화처럼 다루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그녀의 사진은 최종 단계인 합성을 거쳐 완성되면서, 사전에 안배된 구도에 의해 오브제화한 풍경으로 얌전하게 재 가공된 것이다. 안정된 구성은 전체적인 화면을 다소 평면적으로 느껴지게도 할 수 있을 것이지만 오히려 회화성을 보다 더 강화시키기 위한 시도로 이해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그녀의 이미지의 오브제화 방식은 매우 정교한 포석을 깔고 일상의 풍경을 포위하여 사로잡는 전략이다. 그러나 상자에 갇힌 풍경의 이면에서는 피치 못할 이주와 이식에 대한 그녀의 상실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이러한 고립 감은 그녀가 파리에서 시도했었던 신체의 특정 부위를 확대하되 피 촬영자의 시선이 화면 밖으로 배제된 일련의 초상 작업의 연장선상에 서 있다

 

 

 

                                                                      Portable Landscape

                                                                                  -바로크적 상상력

                                                                                                                                                                                  신혜경(사진비평)

 

 

일상의 풍경에서 일탈을 꿈꾸고 있는 작가 이민호,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일년전 소격동의 한 갤러리에서였다. 도시 풍경과 자연 풍경을 확대/축소하고 자르고 덧붙인 풍경화는 작가 자신의 내면 풍경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었다. 작가의 삶이 오롯이 드러난 풍경화는 기억과 현실 풍경의 파편들을 섬세하게 변주하면서 탈출구를 찾고 있었다. 이민호의 작품은 익히 알고 있는 일상의 풍경을 ‘휴대용 풍경’으로 전환하면서 개인화되어가는 현대의 맞춤형 풍경화처럼 해석될 수 도 있지만 그 안에는 현대인의 강박적인 욕망을 넘어선 영원한 오딧세이의 꿈이 들어 있다.

 

이번 전시에서 보여줄 ‘바로크 풍경’은 바로크적인 환상이 덧칠된 일탈이다. 이민호가 추구하는 것은 풍경이 아니라 모험심으로 채워진 여행이다. 현대인의 삶은 그 어느 때보다도 역동적인 상상력에 매료되고 있다. 느끼고 체화되기도 전에 스피디하게 사라져버리는 현대인의 슬픈 단상으로부터 오는 허탈함을 매일 경험하기 때문일 것이다. 변절의 풍경을 과감히 버리고 날아가고 싶은 피터팬의 욕망으로 가득한 작가는 오늘도 현대의 풍경을 새롭게 각색하고 연출하면서 현대인이 추구하는 욕망의 파편을 재구성하고 있다. 바로크적인 아이러니로 가득한 이번 작품은 그래서 현대의 초상처럼 낯설지 않다.

 

알레고리적 바로크

사실 바로크는 ‘일그러진 큰 진주’라는 어원으로 과장되고 왜곡되어 그 가치가 떨어진다는 부정적인 의미로 시작되었고 파격적이고 동적인 표현이 그 특징이다. 특히 미술에서의 바로크는 불규칙적이고 화려한 것을 의미하고 정형화된 규칙이나 비례로부터 벗어난 것들을 즐긴다. 이런 관점으로 볼 때 이민호의 작품은 조형적 장치인 색깔과 장식에서 바로크적인 특징을 다양하게 사용하고 있다. 예를 들면 ‘Portable Landscape Ⅲ N7, N8, N16’은 붉은색 커튼이 화면 전체를 뒤덮고 있는 배경에 작은 황금빛 액자가 있고 그 속의 풍경 이미지 속에는 또 다른 풍경을 담은 현대식 휴대용 가방이 놓여 있다. 바로크풍의 붉은 빛과 황금빛이 주류를 이룬 이들 작품에는 롤랑 바르트가 ‘카메라 루시다’에서 언급했던 ‘스튜디움(studium)’과 ‘푼크툼 (punctum)’이 공존한다.

 

“스튜디움은 나른한 욕망, 잡다한 흥미, 분별없는 취향 따위의 지극히 넓은 영역이다.(...)사진은 위험한 것인데 스튜디움은 그것을 코드화 시킴으로서 사회에 환원해 준다.(...)푼크툼은 세부, 다시 말하면 부분적인 대상이다. 또한 푼크툼의 실례를 보여준다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무방비 상태로 찔릴 때의 적나라함으로 나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다.”(롤랑 바르트의 ‘카메라 루시다’중에서)

 

바로크적인 공간 표현, 색의 강렬함, 풍부한 장식은 바로크적 코드을 배열한 일반적인 정보에 관한 ‘스튜디움(studium)’처럼 읽혀지고, 마지막 이미지, 즉 액자 속의 공간은 코드화 될 수 없는 작은 요소지만 우리의 마음을 찌르는 상처 같은 흔적, ‘푼크툼 (punctum)’으로 다가온다. 뾰족한 창처럼 우리의 눈을 찌르고, 우리를 상상하게 하고, 정점처럼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키는 액자 속의 공간은 이미지가 아니라 비상하는 욕망의 출구처럼 생각된다. 타인에게는 평범한 도시 풍경의 잔상처럼 느껴질 수 있는 작은 디테일은 가슴속에 오랫동안 남아있는 푼크툼, 일상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일탈에 대한 통로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영화, 메트릭스에서 나오는 열쇠처럼 그 통로는 어디든지 떠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속의 이동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번 전시에서 전체적으로 드러나는 붉은빛 커튼과 황금빛 액자, 액자속의 공간, 커튼사이로 보이는 이미지, 이미지속의 또 다른 이미지, 휴대용 여행 가방은 고전적 의미의 바로크적 장치와는 다른 의미이다. 알레고리적 바로크라고나 할까...

 

바로크와 포스트모더니즘

비대칭적이고 극적인 모습의 바로크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다양한 현상과 닮아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인 파편화, 다양성, 혼혈성 등 분열적이고 혼성적인 현상들은 바로크적인 비정상, 기괴함, 과장, 과도한 장식과 그 문맥을 같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바로크시대가 다시 도래했다.’ 라는 미학적 담론이 형성될 정도로 그 관계성은 밀접하다. 이민호의 작품세계 또한 바로크적인 요소가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키지만 그 안에는 불규칙적이고 불완전한 양식을 하나의 사고체계로 받아들이는 포스트모던적인 현상들이 더욱 확연하게 드러난다.

 

이번 전시에서 보여주는 바로크적 상상력이 작동된 ‘Portable Landscape’는 그래서 이중적인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무대을 상징하는 붉은 커튼은 알레고리적 외양과 함께 바로크를 감각적으로 사진으로 옮겨 놓은듯 하지만 바로크적 상상력은 지속적으로 가동되어 현대사회가 품고 있는 다양한 양상을 극대화 시켜서 보여주고 있다. 현대사회의 특징인 절대적인 것을 거부하는 상대성과 해체주의의 모습은 지극히 바로크적이다. 바로크는 과거로의 귀환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사회의 하이브리적 현상을 표현하는 역사성과 현대성이 혼합된 현상으로 재평가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의 이민호의 작품은 화려한 바로크풍 무대 뒤에 감추어진 과거와 현실이 혼합된 인간의 끊임없는 욕망의 변주곡처럼 읽혀진다. 그래서 이민호의 작품은 풍경사진으로 범주화될 수 없다. 풍경화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산업사회가 추구하는 인간 욕구의 잔재가 작품 곳곳에 묻어있기 때문이다. 욕망을 억제시키는 후기 산업사회 시대에 보내는 메시지처럼 해석되는 이번 작품들은 욕구해소를 위한 좁은길의 통로를 제공하는 것처럼 보인다. ‘욕망하는 기계’로서의 현대인에게 일탈할 수 있는 통로를 제공하는 친절한 사진이미지에서 잠시 다른 내일을 꿈꿔본다. 상상력 너머에 있을 ‘Portable Landscape’의 다음 기착점을 생각해 보는 것 또한 이번 작품을 보는 재미이고 일탈이다. 계속될 오딧세이의 여행이 기대된다.

                                   Portable Landscape - Baroque Imagination

                                                                                                                                  SHIN Hye-Kyung(Art Critic)

 

 

Artist Lee Min-ho dreams of deviating from everyday scenes. I first met her one year ago at a gallery in Sokyeok-dong, Seoul. Her landscapes, rendered through enlarging, reducing, cutting, and overlapping urban and natural scenes, described her inner state. The landscapes, wholly revealing her life, were delicate variations of her memories and everyday scenes, while exploring an exit. Lee’s work can be interpreted as custom-made landscape transforming everyday scenes into ‘portable landscapes,’ with a dream for eternal odyssey, beyond contemporary humanity’s obsessive desires, lives within it. The landscapes she presents with this exhibition are also scenes added with baroque fantasies.

 

The landscape she pursues is not mere scenery, but a voyage with adventurous spirit. Contemporary people live their lives captivated by their dynamic imagination, while their fragmentary thoughts disappear, and they feel a vacancy, and blankness. Inspired by a Peter Pan-like desire to fly off, Lee adapts and dramatizes modern landscapes, and recomposes fragments of our contemporary desires. Filled with baroque irony, each artwork on display is more familiar it seems, than modern portraiture.

 

 

Allegorical Baroque

 

The origin of the term ‘baroque’ refers to an ‘irregular shaped pearl,’ so it began with a negative meaning; that something is overstated, distorted, and devalued. Typically though, it is characterized by extraordinary, dynamic expression. Especially in art, where baroque means something grand, complex and virtuosic, deviating from typical regulations and proportion. In respect of this, Lee’s work diversely employs Baroque motifs in colors and ornament.

 

In Portable Landscape III N7, N8, and N16, for example, a red curtain covers an entire canvas, with a small gold-colored frame on its back, within which a modern bag appears, encapsulating another landscape. In this work, red and gold colors prevail; perhaps, the ‘studium’ and ‘punctum’ Roland Barthes mentioned in his Camera Lucida coexist.

 

“The studium is that very wide field of unconcerned desire, of various interest, of inconsequential taste. ---- Photography is dangerous, and the stadium returns photography to society by codifying it. ---- The punctum is details, that is, a partial thing. An example of punctum is to reveal myself when pierced in a defenseless state.” (Camera Lucida by Roland Barthes)

 

 

Baroque-like expressions of space, intense colors, and rich embellishments seem like a ‘studium’; an arrangement of baroque codes, while the space within the frame appears as a ‘punctum’, like a scar in our mind. Like a spear, the space hits our eyes, makes us imagine, and can be an exit for desire. Details that look like afterimages of a common urbanscape can be interpreted as ‘punctum,’ when left in the heart for a long time, or in a passageway for escaping daily routine. Like a key in the film Matrix, the passageway meant spatial and temporal movement. The red curtain, gold-color frame, space within a frame, images seen behind the curtain, an image within another image, and a portable bag, are all devices that have different meanings from those of a typical Baroque apparatus. Her’s is allegoric baroque.

 

 

Baroque and Postmodernism

 

The asymmetric, dramatic features of baroque bear an obvious resemblance to the diverse aspects of postmodernism. Postmodernism’s disruptive, hybrid aspects, such as fragmentation, diversity, and hybridity, share the same methodology as baroque’s abnormality, weirdness, overstatement, and excessive adornment. Postmodernism is so closely associated with baroque it is like the re-arrival of baroque. While in Lee’s work baroque elements draw our attention, postmodern aspects that show an irregular, incomplete style, as a thinking system perhaps, also appear in her work.

 

Portable Landscape, inspired by her baroque imagination, can be interpreted as holding a double meaning. Exhibited works look like photographs provoking a baroque atmosphere, along with allegories derived from the red curtain, but they maximize diverse aspects of contemporary society, while consistently maintaining her baroque imagination. Relativism – rejection of an absolute - and destructivism are features of contemporary society and are extremely baroque. Baroque can be reevaluated as a hybrid phenomenon of contemporary society, blending historicity and modernity, and not as a return to the past. In this context, Lee’s work is seen as a variation on humanity’s insatiable desire hidden behind a flamboyant, baroque stage. Therefore, Lee’s work cannot be categorized as landscape photography. Her work presents vestiges of human desire, not landscapes.

 

For a while we can dream of a different tomorrow, from familiar, friendly images, offering a passageway to get rid of desire - a ‘desiring machine’ perhaps. As another interest in and amusement from our appreciating Portable Landscape, we can think about its next destination. Perhaps, Lee’s upcoming odyssey.

 현대도시를 유영하는 휴대용 풍경

                                                                                                                                                    김준기 (미술비평)

 

이민호는 문학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간결한 문체의 서사를 구사하는 사진 작업을 보여준다. 그의 내러티브는 극적인 반전이 담긴 스펙터클한 거대서사가 아니라 일상 속에서 반복되는 미세한 차이의 연쇄들이다. 이번 전시의 출품작인 <휴대용 풍경> 연작에서 현대도시를 자신의 직관으로 재배치하고 그 속에서 유영하려는 그의 시선은 도시의 공장굴뚝을 포착해서 산업사회의 단면을 드러내며, 어디선가 목격한 것 같은 잔잔한 풍경 속에서 세상의 이치를 발견해 낸다거나, 도드라져 보이는 사물보다는 그 아래 축축한 바닥 같이 후미지고 너저분한 곳에 머물곤 한다. 이렇듯 이민호는 전체를 보여주지 않고 부분만을 보여줌으로써 전체의 모습을 상상하게 한다. 이러한 특징은 인체를 다루거나 도시를 다룬 구작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눈 아래 부분만을 클로우즈업한 무표정한 얼굴을 거대한 캔버스에 그려내는 것이 이민호의 회화작업 <익명의 초상> 원래의 아이디어이다. 그는 인간의 표정이나 인상을 가장 민감하게 드러내는 눈을 제외함으로써 낯선 구도의 얼굴을 끌어낼뿐더러 그것을 매우 거대한 크기의 그림으로 재현해냈다. 이것은 매우 특수한 구조의 감성표현 방법이다. 이들 연작은 꽉 다문 입술에 굳은 표정의 얼굴의 일부분을 거대한 화면으로 접했을 때의 생경함을 제공했다. 이 작업의 후기 연작들은 코와 입술만을 부각시켜 흐릿한 표면으로 처리함으로써 익명의 인물을 초상으로 드러내는 데 있어서 한층 더 깊은 맛을 냈다.

 

얼굴을 생략한 인체나 일부분을 과장한 얼굴을 그리는 회화 작업을 해오던 이민호는 그 문제의식을 사진 작업으로 확장했다. <불확실한 증명사진> 연작은 몸통을 중심으로 눈 아래쪽과 무릎 위쪽만을 담는 인체사진이다. 이 연작은 증명사진의 기본적인 어법을 어기면서 실용적인 목적과는 정반대의 길을 선택한다. 눈을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피사체가 누구인지를 뚜렷하게 드러내지 않는 증명사진이다. 이 사진은 실용적인 목적의 증명사진이 어떤 방식으로 한 인물의 정체를 증명하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나아가 결정적인 단서를 상실한 이미지가 어떻게 가려진 부분을 재구성해서 새로운 상상을 만들어내는지를 드러내기도 한다. 불충분한 단서를 가지고도 피사체의 정체를 분간해내는 데 동참하거나 또는 익명의 현대인의 모습을 매우 덤덤하게 읽어내는 데도 그의 이러한 어법은 매우 효과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그는 사회 시스템 속에서 한 인간의 존재를 증명해내는 증명사진에 관심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불완전한 재현을 감행했다. 상호대면에 의한 소통보다는 익명의 소통에 의해서 더욱 조밀하게 구조화한 네트워크 시대의 현실을 드러내기 위해서 눈 아래 부분을 찍은 인물사진을 제시했다. 인화를 맡겼던 사진을 찾으면서 잘못 찍은 사진임을 암시하는  ‘영수불가(NON FACTURE)’라는 딱지가 붙여진 사실을 발견한 작가는 이 사진들을 통해서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있는 사진적 재현과 그것을 통해서 사회적 존재로서 자리매김하는 소통 시스템에 대해 질문하기 시작했다.

 

이민호의 시선은 도시의 풍경을 잡아내는 데 있어서도 일관성을 발휘한다. 그는 인간과 도시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 다큐멘터리 사진을 찍었다. 그것은 온전히 정체를 드러내는 인간이 아니며 정연하게 질서를 갖춘 도시가 아니었다. 도시 프로젝트인 ‘우리는 여기 산다( We live here)’는 프랑스 파리의 보그르넬(Beaugrenelle) 지역의 빌딩과 아파트들을 담고 있다. 쌩시프리앙(Saint-Syprien)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이 전시에서 그는 비대한 도시공간을 통해서 왜소한 인간의 모습을 반증하고자 했다. 작업실 창밖으로 보이는 연기 뿜는 공장굴뚝은 역설적인 의미에서 끊임없이 움직이는 도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민호는 작가노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진의 앵글로 나는  또 다른 세계를 본다. 이 세계는 내가 보여주고 싶다고 선택한 곳이며, 그 속에 하나의 도시가 있고 한 지점이 있다, 그 세계는 나와 같은 보통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들은 차갑고 건조한  금속과 유리와 시멘트로 구조된 초현대식 건물들 속에서 살고 있다. 그곳은 현대식 삶의 안락함을 누리고 있지만 이웃들과의 자연스런 접촉에는 어려움이 있어 보인다.  첨단 기술의 도움으로 세계는 많이 가까워졌지만 따뜻한 체온을 나눌 수 있는 소통문화의 세계에서는 멀어져있다. 왜냐하면 이곳의 초현대식 건물에서 느낄 수 있는 보이지 않는 철옹성의  벽이 누구도 감히 넘을 생각을 못하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세계는 나에게 가깝기도 하지만 또 낯설고 먼 곳으로 다가온다.” 이러한 인식과 감각은 한국의 일산과 용산 등을 담은 도시풍경 연작에서도 같은 맥락으로 드러난다. 지하철 안에서 만난 사람, 도시공간의 생소한 풍경들을 통해서 그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을 소통을 가로막는 장벽에 둘러싸인 곳으로 포착해내고 있다.

 

현대인과 현대도시를 담아온 이민호는 이번 전시의 출품작인 <휴대용 풍경> 연작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직조하는 다양한 시공간을 사진이미지 속에 재배치한다. 그의 작업은 세 단계를 거친다. 우선 도시의 풍경을 비롯해서 자연과 인물의 이미지들을 찍어서 인화한다. 이어서 그는 휴대용 가방의 덮개 부분에 사진 프린트를 넣고 아래쪽에는 잔디를 설치한다. 마지막 단계에서 그는 이 가방을 도시공간이나 실내공간 곳곳에 옮겨놓고 사진을 찍는다. 그것은 사진과 설치를 혼합한 것이며, 사진을 사진 속에 담아내는 이중구조를 취하고 있다. 이야기 속에 이야기를 배치하는 액자소설처럼 사진 속에 사진을 배치하는 이민호의 의도는 시공을 초월하는 도시공간이나 현대사회의 직조방식을 보다 선명하게 드러내는 데 있다. 연작 가운데 상당수가 파리의 작업실 창밖의 공장 굴뚝 풍경을 담고 있다. 이들 파리의 풍경은 다시 도시의 콘크리트 구조물이나 실내 공간, 버려진 땅 등의 낯선 공간과 조우한다. 그것도 파릇파릇하게 자라 오른 잔디와 함께 가방에 담긴 채 말이다. 이렇듯 한 컷의 사진 이미지 안에 이질적인 요소들을 함께 담아내는 것은 자신의 체험이 관통하고 있는 동시대의 모습을 보다 조밀한 언어로 드러내기 위한 전략이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동일율을 반복하고 있는 삶의 체험 같은 것을 이동이나 여행을 상징하는 가방 속에 담고 이것을 다시 액자소설의 방식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민호의 사진이 디지털합성이 아닌 아날로그배치에 의한 이미지 속의 이미지라는 점 또한 언급할만한 요소이다. 그는 최종적인 결과물로 프린트한 사진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에 있어서 가방이나 상자에 잔디를 키우고 사진을 붙이는 설치작업을 하고 다시 그것을 현장에 배치한 후에 실사촬영을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얻은 사진은 디지털합성에 의해서도 가능한 작업이다. 그러나 이민호는 찍고, 뽑고, 붙이고, 기르고, 옮기고, 놓고, 다시 찍어서 뽑는 일련의 수행과정을 거친다. 이 과정에서 그는 실재를 담은 사진이미지와 실재의 관계, 사진이미지를 담은 상자와 실재풍경과의 관계, 세 번째 단계를 거쳐서 얻은 사진이미지와 앞의 두 단계에서 사용한 실재의 관계 등에 대해 매우 섬세한 비평적 선택을 반복한다. 이 점은 그가 선택한 조합의 면면을 살펴보면 잘 알 수 있다. 가령, 고철덩어리들을 담은 사진 박스를 꽃병과 시계와 테이블이 있는 풍경 위에 얹어 둔다던지, 재활용 쓰레기와 곱게 수놓은 레이스가 있는 거실, 공장과 침대, 침대와 콘크리트 구조물, 예쁜 거실과 쓸쓸한 거리의 평상 등이 공존하는 이민호의 사진은 이질적인 요소들 사이의 대립쌍을 이룬다. 반면에 임진각 잔디밭에서 찍은 뒷모습과 실재의 잔디밭, 병실침대와 잡초밭, 아파트 숲과 거실 등과 같이 직간접적인 연상작용을 일으키는 것도 있다. 이러한 이항구조의 만남들은 신체를 매개로 한 수행과정을 통해서 예술적 직관을 드러내려는 이민호의 의도를 해독하는 단초이다.

 

구작과 신작을 통해서 드러나는 독특한 시선들, 그러니까 생략과 과정에 기초한 증명사진, 도시의 부분이나 구석을 담아내는 독특한 시선, 액자 속에 사진을 담아서 사진 찍기 등과 같은 요소들은 이민호 사진의 주요한 변별점이다. 특히 그의 신작들은 스트레이트 다큐멘터리 사진이면서 동시에 설치나 퍼포먼스의 수행성을 가미한 사진이다. 그가 회화와 사진, 설치 등을 넘나들고 있는 것은 매체 중심의 사고가 아닌 주제나 표현 중심의 사고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유동성은 그가 활동하고 있는 장이 시각언어 실험을 주요한 원천으로 꼽는 예술의 장으로 인해 그 정당성을 획득한다. 그는 증명사진의 어법을 차용하되 그것을 인간의 정체를 완전하게 증명할 수 없는 사진으로 만들어낸다. 도시의 풍경을 담아내되 도시의 지형을 읽어내는 것이 아니라 꿈틀거리며 작동하는 프로그램의 부산물인 연기를 잡아낸다. 말하자면 그가 포착하는 인물과 도시는 정직한 기록을 통해 실재를 표상하기보다는 부적절한 표현을 빌어서 실재의 이미지를 재구성한다. 이민호의 작업이 예술적 언어로서 살아있는 것은 이처럼 실용적인 기록의 맥락보다는 비실용적인 발언의 맥락에 무게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점 때문에 우리는 이민호의 사진을 보다 섬세한 분석과 해석의 관점에서 꼼꼼하게 살펴보곤 한다. 이민호 사진의 여러 요소들이 서로 어떤 연관을 가지며 새로운 이야기를 구성하는지를 파악하는 것은 작가나 비평가뿐만 아니라 각자의 체험이나 이해의 폭을 가진 수많은 독자들에게 더 넓게 열려있다. 이민호 사진의 진정한 매력은 이렇듯 생활정서에 근거를 둔 독자 다수의 공감을 얻어낼 수 있다는 데 있다.

                                                                     Portable Landscape _ 휴대용풍경

 

                                                                                                                                                                      이민호

 

창문으로 매일 거대한 연기를 내뿜는 공장의 굴뚝들이 보인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아주 자연스러워 하면서도 경외의 시선을 던진다. 어쩌면 이 시대의 풍경의 하나로 간주하고 있는 것인 듯 하다. 우리의 필요에 의해 조성된 이 풍경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서도 너무나 견고한 사회 속에 살고있다고 느끼게 된다.

 

2002년 봄부터 2005년 까지 있었던 프랑스 파리근교에 위치한 이씨레물리노 시의 아치 작업실 앞의 공장건물, 그 뒤에서 매일 끊임없이 연기를 뿜어대던 두개의 커다란 굴뚝들. 그날 그날의 일기변화에 따라 다른 방향 또는 다른 색으로 연출되었던 것은 그곳 폐기물 소각장에서 나오는 연기였다. 파리라는 대 도시 그리고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배설구가 되어준 곳. 현대 도시풍경중의 하나이다. 자연의 모습만을 풍경이라고 이름 짓는 일은 이제 없다. 언젠가 부 터 도시의 회색 건물들이 더 정겹게 느껴질 수도 있게 된 이 시대에 풍경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도심 속에 반듯반듯하게 인공적으로 조성된 정원 또는 공원에서 느껴지는 나무나 잔디의 푸르름이 인위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꼭 나만의 판단은 아닐 것이다. 이미 규격화  되어있는 이러한 풍경들의 이미지화가 나의 작업이다. 점차 개인화 되어가는 이 시대 속에서 갈수록 첨단화 되어가는 개인용 기기들 [핸드 폰, MP3, 노트북등등… ]. 이러한 여건들에 맞춰진 휴대를 할 수 있는 풍경은 어떤 것이 될까를 생각한다.

Factory chimneys belching out copious clouds of smoke are seen through a window. In spite of the familiarity, people stare them with an overwhelming feeling of admiration. They seem to be accepted as a placid, everyday scene. This planned landscape out of our necessity suggests that I am not the only one who feels ourselves confined within a solid framework of society. 

 

A distant view of factory buildings and two huge towers belching out smokes incessantly was what I have seen through a window, while staying at the Arches studio, in the city of Issy-les-Moulineaux from spring of 2002 to 2005. The unpredictability of weather created a variety of smokes in its shapes and colours. The hot vapor out of the incinerator serves as an outlet for people living in Paris as if it were a snapshot of urban system. Feeling attached more onto urban gray buildings, I came to recognize that landscape does not define only an expanse of natural scenery. Many people would agree with the idea that green colour from the carefully constructed grass feels synthetic and artificial in the citified environment. This series features the depictions of the existing urbanized landscapes, addressing the possibility that they could be portable through the state-of-the-art personal gadgets such as cellular phones, MP3, and lapt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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